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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페리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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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킬페리쿠스 1세는 6세기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클로타르 1세의 아들이다. 그는 형제들과 왕국을 분할한 후 수아송을 중심으로 한 영토를 다스렸으며, 지게베르트 1세와의 전쟁, 아내 갈스윈타의 죽음, 프레데군드와의 결혼 등으로 인해 격동적인 시대를 보냈다. 킬페리쿠스는 또한 문화적인 면모도 보여 음악, 시, 법률 개혁에 관심을 가졌으나,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와 같은 인물에게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는 584년 암살당했으며, 그의 아들 클로타르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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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페리쿠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6세기 메달에 묘사된 킬페리크 1세의 초상
16세기 메달에 묘사된 킬페리크 1세의 초상
군주 칭호네우스트리아 왕
통치 기간561년–584년
이전 통치자클로타르 1세
다음 통치자클로타르 2세
출생일기원후 539년경
사망일584년 9월
사망 장소
왕가메로빙거 왕조
왕조 유형왕조
아버지클로타르 1세
어머니아레군트
배우자아우도베라
갈스빈타
프레데군트
자녀테우데베르트
바시나
리군트
클로타르 2세

2. 생애

561년 아버지 클로타르 1세가 죽자 킬페리쿠스 1세는 왕국 전체를 차지하려 했다. 베르니-리비에르의 왕궁에 있던 보물을 차지하고 파리로 들어갔으나, 형제들이 왕국을 분할하도록 강요했다. 킬페리쿠스는 수아송, 아미앵, 아라스, 캉브레, 테루안, 투르네, 불로뉴쉬르메르를 분할받았다. 맏형 카리베르 1세는 파리, 둘째 형 군트람은 오를레앙을 수도로 하는 부르군트, 지게베르트 1세는 아우스트라시아를 받았다. 567년 카리베르 1세가 죽자 형제들은 그의 왕국을 나누어 파리와 그 주변 지역을 공동 소유하기로 합의하면서 킬페리쿠스의 영지는 더 커졌다.

''Le jugement de Chilpéric'', 장 폴 로렌스의 킬페리크의 폭군적 묘사


즉위 직후, 킬페리쿠스는 지게베르트와 전쟁을 벌였다. 지게베르트가 판노니아 아바르족을 상대로 승리하고 킬페리쿠스가 랭스를 점령하자, 지게베르트는 돌아와 랭스를 탈환하고 수아송을 점령하여 킬페리쿠스의 장남 수아송의 테오데베르트를 투옥했다. 567년 카리베르 1세의 죽음으로 전쟁이 격화되었고, 킬페리쿠스는 지게베르트의 영토를 침공했지만 패배했다. 이후 군트람과 동맹을 맺었지만, 군트람이 지게베르트 편으로 돌아서면서 킬페리쿠스는 다시 패배했다.

지게베르트 1세가 아우스트라시아의 브룬힐다와 결혼하자, 킬페리쿠스 1세도 화려한 결혼을 원했다. 그는 첫 번째 아내인 아우도베라를 버리고 프레데군드를 첩으로 삼았다. 이후 프레데군드를 내쫓고 브룬힐다의 여동생인 갈스윈타와 결혼했지만, 곧 싫증을 느껴 갈스윈타는 침대에서 목이 졸려 죽은 채 발견되었다. 며칠 후 킬페리쿠스는 프레데군드와 결혼했다.

이 살인 사건으로 킬페리쿠스와 지게베르트 사이에 더 길고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고, 투르푸아티에를 중심으로 휴전과 재개를 반복했다. 575년 12월, 지게베르트는 프레데군드가 보낸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킬페리쿠스는 지게베르트의 아내와 아들의 보호자인 군트람과 전쟁을 벌였다. 킬페리쿠스는 지게베르트 측 귀족들의 충성을 얻고, 아우스트라시아로부터 투르와 푸아티에, 아키텐 일부를 빼앗았으며, 군트람의 장군 뭄몰과 전투를 벌였다. 또한 킬데베르트 2세의 미성년 기간 동안 동쪽 왕국에 불화를 조장했다.

578년, 킬페리크는 빌렌 강을 따라 브로-웨네드의 아모리카 통치자 와로크 2세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프랑크 군대는 푸아투, 투렌, 앙주 백작령, 메인 및 바유에서 온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바유 출신의 ''바이오카센세스''는 작센족이었으며 브르타뉴인들에게 패배했다.[2] 군대는 3일 동안 전투를 벌였고, 와로크는 항복하고 반느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으며,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연례 조공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그는 이후 맹세를 어겼지만, 킬페리크의 브르타뉴인에 대한 지배는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가 시에서 축하하는 것처럼 비교적 안전했다.

킬페리쿠스에 대해 알려진 대부분은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프랑크족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킬페리쿠스를 혐오하여 그를 "그 시대의 네로와 헤로데 대왕" (VI.46)이라고 불렀다.[3] 그레고리우스는 킬페리쿠스가 투르를 빼앗고, 교회 재산을 압수하고, 성직자가 아닌 사람을 주교로 임명한 것에 분노했다. 또한 킬페리쿠스가 삼위일체에 대한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려고 시도하는 것에 반대했지만,[3] 일부 학자들은 그레고리우스가 킬페리크를 얼마나 싫어했는지에 대해 이견을 제시한다.[4]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킬페리쿠스는 또한 유대인에 대한 강제 개종을 시도했다.[5]

킬페리쿠스의 누스트리아 통치 기간에는 비잔틴의 처벌인 눈을 찌르는 형벌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문화인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 재능 있는 음악가였고, 시를 썼으며(코엘리우스 세둘리우스의 시를 본떠서), 프랑크 알파벳을 개혁하려 했으며, 여성에 대한 살리카 법의 최악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584년 9월, 킬페리크는 그의 왕궁인 셸, 센에마른에서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신원 미상의 자객에게 칼에 찔려 죽었다.[6] 그는 파리의 생 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 내 생 빈센트 바실리카에 묻혔다.

2. 1. 초기 생애와 분할 통치

561년 아버지 클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킬페리쿠스 1세는 베르니-리비에르의 왕궁에 보관되어 있던 보물을 차지하고 파리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왕국을 분할하도록 강요했다.[7] 킬페리쿠스는 수아송아미앵, 아라스, 캉브레, 테루안, 투르네, 불로뉴쉬르메르를 분할받았다.[8] 그의 맏형인 카리베르 1세는 파리를, 둘째 형인 군트람은 오를레앙을 수도로 하는 부르군트를, 지게베르트 1세는 아우스트라시아를 받았다.

클로타르 1세 사망 후 프랑크 왕국, 561년


567년 카리베르 1세가 죽자 킬페리쿠스의 영지는 더 커졌다. 형제들은 카리베르 1세의 왕국을 나누어 파리와 그 주변 지역을 공동으로 소유하기로 합의했다.[9]

카리베르 1세 사망 후 프랑크 왕국

2. 2. 갈스빈타의 죽음과 형제와의 갈등



킬페리크와 지게베르트의 전쟁 (572년)


킬페리크의 랭스 침공 (574년)


지게베르트의 킬페리크 공격 직전 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 (575년)


지게베르트 1세가 아우스트라시아의 브룬힐다와 결혼하자, 킬페리크 1세도 화려한 결혼을 원했다. 그는 이미 첫 번째 아내인 아우도베라와 이혼하고 프레데군드를 첩으로 두고 있었다. 킬페리크는 프레데군드를 내쫓고 브룬힐다의 여동생인 갈스윈타와 567년 결혼했다. 그러나 곧 새 아내에게 싫증을 느꼈고, 얼마 뒤 갈스윈타는 침대에서 목이 졸려 죽은 채 발견되었다. 며칠 후 킬페리크는 프레데군드와 결혼했다.[9]

이 사건으로 킬페리크와 지게베르트 사이에 길고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다. 573년 킬페리크는 투르와 푸아티에를 침공했다.[10] 전쟁은 투르와 푸아티에를 중심으로 휴전과 재개를 반복했다. 575년 12월, 지게베르트는 프레데군드가 보낸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했다. 암살자들은 이 임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부모에게 큰 보상을 약속받았다. 지게베르트는 투르네와 루앙에서 포위되고 킬페리크의 아들 티베르트가 파리 근처에서 살해당하는 등 궁지에 몰렸을 때, 불법적으로 파리에 들어가 도시를 점령했다. 이후 킬페리크는 지게베르트의 아내와 아들의 보호자인 군트람과 전쟁을 벌였다. 킬페리크는 지게베르트 측 귀족들의 충성을 얻고, 아우스트라시아로부터 투르와 푸아티에, 아키텐 일부(생트, 오베르뉴)를 빼앗았으며, 군트람의 장군 뭄몰과 전투를 벌였다.[1] 또한 킬데베르트 2세의 미성년 기간 동안 동쪽 왕국에 불화를 조장했다.

2. 3. 지게베르트 1세의 암살과 그 이후



지게베르트 1세 사망 후 프랑크 왕국


킬페리크 1세가 남부를 확보한 후 프랑크 왕국


지게베르트 1세가 아타나길드의 딸인 아우스트라시아의 브룬힐다와 결혼하자, 킬페리크 1세도 화려한 결혼을 원했다. 그는 이미 첫 번째 아내인 아우도베라를 버리고, 프레데군드라는 시녀를 첩으로 삼았다. 그는 이에 따라 프레데군드를 내쫓고 브룬힐다의 여동생인 갈스윈타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곧 새 아내에게 싫증을 느꼈고, 어느 날 아침 갈스윈타는 침대에서 목이 졸려 죽은 채 발견되었다. 며칠 후 킬페리크 1세는 프레데군드와 결혼했다.[1]

이 살인은 킬페리크 1세와 지게베르트 1세 사이에 더 길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켰으며, 대개 투르푸아티에에서 현상 유지를 하면서 휴전을 맺었다. 575년 12월 초, 지게베르트 1세는 프레데군드의 사주를 받은 두 명의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는데, 이들은 이 행위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부모가 매우 부유해질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지게베르트 1세는 투르네와 루앙에서 포위되고 킬페리크 1세의 아들 티베르트가 파리 근처에서 살해당했을 때, 불법적으로 파리에 들어가 도시를 점령했다. 킬페리크 1세는 그 후 지게베르트 1세의 아내와 아들의 보호자인 군트람과 전쟁을 벌였다. 킬페리크 1세는 지게베르트 1세 편에 섰던 귀족들의 충성을 얻었고, 아우스트라시아로부터 투르와 푸아티에, 그리고 아키텐의 일부 지역(생트, 오베르뉴 지역)을 빼앗았으며, 군트람의 지휘를 받는 뭄몰을 상대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1] 또한 킬데베르트 2세의 미성년 기간 동안 동쪽 왕국에 불화를 조장했다.[1]

2. 4. 브르타뉴와의 관계

578년, 킬페리크는 빌렌 강을 따라 브로-웨네드의 아모리카 통치자 와로크 2세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프랑크 군대는 푸아투, 투렌, 앙주 백작령, 메인 및 바유에서 온 부대로 구성되었다. 특히 바유 출신의 ''바이오카센세스''는 작센족이었으며 브르타뉴인들에게 패배했다.[2] 군대는 3일 동안 전투를 벌였고, 와로크는 항복하고 반느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으며,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연례 조공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그는 이후 맹세를 어겼지만, 킬페리크의 브르타뉴인에 대한 지배는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가 시에서 축하하는 것처럼 비교적 안전했다.

바니스의 프랑스 침략

2. 5.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와의 관계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프랑크족의 역사''에서 킬페리크 1세를 "그 시대의 네로, 헤로데 대왕" (VI.46)이라고 부르며 혐오했다.[3] 킬페리크가 아우스트라시아로부터 투르를 빼앗고, 교회 재산을 압수하고, 성직자가 아닌 궁정 백작을 주교로 임명한 것에 분노했다. 또한 킬페리크가 삼위일체에 대한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려고 시도하는 것에 반대했다.[3] 다만, 일부 학자들은 그레고리우스가 킬페리크를 얼마나 싫어했는지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기도 한다.[4]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킬페리크는 유대인에게 강제 개종을 시도하기도 했다.[5]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킬페리크의 시를 강제로 듣고 있다. 장 폴 로렌스의 ''힐페리크와 투르의 그레고리우스''

2. 6. 문화 군주로서의 면모

킬페리쿠스 1세는 문화 군주로서 여러 면모를 보였다. 비록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를 "그 시대의 네로와 헤로데 대왕"이라 부르며 몹시 싫어했지만,[3] 킬페리쿠스는 예술과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킬페리크 1세의 현대 초상화


그는 어느 정도 재능 있는 음악가였고, 코엘리우스 세둘리우스의 시를 본떠 시를 쓰기도 했다.[6] 또한 프랑크 알파벳을 개혁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여성에 대한 살리카 법의 부정적인 영향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킬페리쿠스의 누스트리아 통치 시기에는 비잔틴 제국의 형벌인 눈을 찌르는 형벌이 도입되기도 했다. 한편,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킬페리쿠스는 유대인들에게 강제 개종을 시도하기도 했다.[5]

2. 7. 죽음

584년 9월, 킬페리크 1세는 셸(센에마른)에 있는 자신의 왕궁에서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신원 미상의 자객에게 칼에 찔려 죽었다.[6] 그는 파리의 생 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 내 생 빈센트 바실리카에 묻혔다.[6]

클로타르 1세와 왕비 아레군트의 아들로 태어난 킬페리크 1세는, 561년 아버지 클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마자 왕궁이 있던 브렌으로 가서 아버지의 재산을 몰수하고, 브렌 인근 유력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7] 왕국의 전사들은 킬페리크 1세를 왕으로 추대했고, 그는 파리를 점령했다. 그러나 다른 세 형제들과의 타협을 통해 왕국을 분할 상속받아 아버지의 영지였던 수아송을 다스렸다.[8]

567년, 맏형 카리베르 1세가 죽자 킬페리크 1세는 파리의 3분의 1과 리모주, 카오르, 보르도피레네 지방을 상속받았다. 같은 해 서고트 왕 아타나길드의 딸 갈스빈트와 결혼했으나, 이듬해 갈스빈트는 킬페리크 1세의 측근에 의해 침실에서 교살당했다.[9]

갈스빈트의 여동생 브룬힐다와 결혼했던 킬페리크 1세의 형 지게베르트 1세는 복수를 요구했고, 군트람의 중재로 대민회가 열렸다. 살리카 법에 따라 리모주, 카오르, 보르도 등이 브룬힐다의 소유가 되었으나, 킬페리크 1세는 불복하고 573년 아들 클로비스의 군대를 보내 투르와 푸아티에를 침공했다.[10] 2년간의 내전 후, 킬페리크 1세의 자객에 의해 지게베르트 1세가 암살되었다.

584년 9월, 사냥에서 돌아온 킬페리크 1세는 자객에게 살해되었고, 범인은 시종 에베르루프로 알려졌으며 그의 영지는 몰수되었다.[11]

3. 가족 관계

킬페리쿠스 1세는 아우도베라와 처음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킬페리쿠스 1세와 아우도베라의 자녀
이름설명
테우데베르트573년 전투 중 사망
메로베흐577년 본인의 요청으로 하인에게 살해됨. 브룬힐다(결혼으로 맺어진 아버지의 고모)와 결혼하여 아버지의 적이 됨
클로비스580년 프레데군트에 의해 암살됨
바시나590년 이후 사망. 수녀; 푸아티에 수도원에서 반란을 주도함
칠데신다이질로 어려서 사망



갈스빈타와의 짧은 두 번째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었다.[9]

568년경 프레데군트와 동거 및 결혼하여 6명의 적자가 태어났다.

킬페리쿠스 1세와 프레데군트의 자녀
이름설명
리그운트569년경 – 589년 이후, 레카레드에게 약혼했으나 결혼하지 못함
클로데베르트570/72년경 – 580, 어려서 사망
삼손573년경 – 577년 말, 어려서 사망
다고베르트579/80년경 – 580, 어려서 사망
테우데리크582년경 – 584, 어려서 사망
클로타르 2세584년 9월 이전 – 629년 10월 18일, 킬페리쿠스의 누스트리아 계승자, 이후 프랑크족의 유일한 왕


4. 평가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해당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5. 기타

프랑크어에서 킬페리쿠스라는 이름은 "강력한 지지자"를 뜻하며, 독일어로는 "보조적인"을 의미하는 hilfreichde와 유사하다. 이는 독일어 Hilfede(도움, 지원)와 reichde(부유한, 원래는 강력한)와 비교해 볼 수 있다.

1864년에는 에르베가 이 주제를 다룬 오페레타 《킬페리크》를 만들어 초연했다.

참조

[1] 서적 Chilpéric Ier: le roi assassiné deux fois Louve
[2] 문서
[3] 웹사이트 Gregory of Tours https://web.archive.[...] 2005-12-31
[4] 서적 'Nero and Herod? The death of Chilperic and Gregory of Tours' writing of history' Brill
[5] 서적 A History of the Franks Pantianos Classics
[6] 서적 The Dark Ages, 476-918 https://books.google[...] Rivingtons
[7] 서적 メロヴィング王朝史話 岩波文庫
[8] 서적 メロヴィング王朝史話 岩波文庫
[9] 서적 メロヴィング王朝史話 岩波文庫
[10] 서적 メロヴィング王朝史話 岩波文庫
[11] 서적 フランス封建制度起源論 岩波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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